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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 장] 6·25 터져 불체자 신세…농장 수용소로

  ━   한국 예술 알리는 '민간 외교관'       6·25 전쟁 귀국길 막혀 고심 끝 미국 체류 선택   이민국 구치소서 농장행 계절노동자 방갈로 생활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억은 한국에서의 학창시절이다.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항을 통해 돌아온 뒤 서울로 올라가 공부했던 시기다. 미국에서 겪은 고된 시간을 보상받는 것 같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부터 휴전 협정을 맺은 1953년까지 미국에서의 삶은 잊고 싶은 기억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기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때 겪은 이야기를 털어놓으려면 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0년대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버지가 LA로 떠나다   영어를 못해 학교에서 방황할 때마다 늘 공부하라고 다독였던 아버지(장지환·1993년 작고)는 향학열이 높은 분이다. 한국을 삼킨 일본이 진주만 폭격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 한복판에 뛰어들었을 때도, 미군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여하고 항복한 일본군이 한반도를 떠날 때도 아버지는 늘 공부에 집중하셨다.     전쟁이 끝나자 아버지의 실력은 빛을 보게 됐다. 미국에서 온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한국 정부의 초석을 다질 때였다. 교통부 산하 수산국에 취직한 아버지는 선박 수리 업무를 맡게 됐는데 당시 중요한 선박 수리는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에서 할 수 없었기에 일본이나 중국으로 찾아가야 했다. 아버지는 일본어와 영어, 중국어까지 구사했기에 해외 출장을 도맡다시피 했다. 그러다 한국 정부 최초 외교관 중 한 명으로 발탁되며 또 한 번 실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 정부와의 파트너십을 맺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 첫 과정이 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LA에 총영사관을 설치하는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그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남한에 주둔했던 군정 사령관 존 하지(John Hodge) 중장은 외교관 파견을 앞둔 한국 정부에 반드시 의사소통이 가능한 외교관을 파견해달라는 조건을 제시했고 한국 정부는 신중하게 외교관을 물색하다 아버지를 낙점했다. 교육수준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영어를 구사할 수 있고 한국 정부의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기에 미국 정부는 아버지의 비자 발급을 신속하게 진행했다.     아버지는 제일 먼저 LA에 도착해 총영사관으로 사용할 사무실을 구하고 한인 커뮤니티 관계자들을 만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첫 총영사로 부임할 가족들이 거주할 관저를 물색해 계약하는 일까지 모든 일을 맡아 처리했다. 8개월 후 민희식 총영사는 LA의 초대 총영사로 부임했다.     6·25 전쟁에 발이 묶이다   1950년, 영사로서 임무 수행을 마친 아버지는 한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출국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됐고 민간인 승객들을 수송하던 항공기들은 한국행 노선 운행을 중단했다. 다른 모든 사람과 똑같이 아버지는 충격에 빠졌고 한국으로 돌아갈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밖에 양복을 차려입은 미국인들이 찾아왔다. 이민국 요원들이었다.     이들은 아버지가 문을 열고 대화를 몇 마디 나누자 다짜고짜 수갑을 채우려 들었다. 아버지는 이들에게 가까스로 항변해서 수갑을 면했지만, 그때의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버지가 외교관이라는 점이 참작돼 며칠간의 시간을 벌었던 것 같지만 그 시간도 오래가지 않았다. 가족들은 롱비치에 있는 이민국 구치소에 수감됐다. 철장 안에서 생활하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동생들은 너무 어려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 있었지만 난 10살이 넘었다며 아버지와도 같은 곳에 수감되지 않고 아동용 구치소에 따로 지내야 했다. 구치소는 성인들에게 운동할 수 있도록 감방 밖으로 나오는 시간을 허용했는데 난 그때도 홀로 남아 있었다. 나중에 어머니를 만났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부모, 형제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행복했다.   불체자 신세가 되다   아버지는 고민이 깊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미국에 이민법을 위반한 불법체류자 신세로 남는 길을 선택해야 했다. 다른 나라로 떠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이동하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미국에 남는 쪽을 선택했다. 지금도 아버지의 의중을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미국에 정착하려 한 것 아닐까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미국에 올 때 집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도자기와 미술품 몇 점 가져왔는데 그걸 당시 LA한인사회의 유지였던 송철(영어명 리오)씨에게 맡겼다. 송씨는 과일 도매상과 패키징 회사를 운영해 성공한 사업가이자 이승만 박사와 함께 동지회를 창설하고 나중에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장으로 활동한 남가주 한인사회의 리더였다.     아버지는 외교관 모임이 열릴 때마다 초대한 손님들에게 자신의 소장품을 보여주며 대화를 시작하곤 했다. 그러고 보면 그때부터 예술을 이용해 외교를 한 셈이다. 문화 배경은 다르지만 예술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관계도 가까워지고 상대방의 수준도 알 수 있게 된다. 한국 문화는 물론 한국이라는 나라에 문외한이던 미국인들은 아버지가 설명하는 한국과 전통예술,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한국을 좀 더 많이, 그리고 더 가까이 배웠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신문 배달과 코카콜라 병 판매로 번 돈으로 야구경기 카드를 수집했었다. 야구 광팬은 아니지만 다른 아이들이 카드를 즐겨 모으는 것을 보고 따라서 했는데 아마도 그때부터 수집 욕구가 생겨난 것 같다.     농장 수용소에 갇히다   이민서비스국은 당시 구치소만 운영하는 게 아니라 노동수용소도 운영하고 있었다. 롱비치 구치소에서 한 달가량 갇혀 지내던 어느 날 우리 가족은 컬버시티에 있는 농장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배추 등 채소를 경작하는 곳이었는데 우리가 살 집은 계절노동자들을 위해 지은 방갈로였다. 부엌과 화장실은 체포된 다른 불법 이민자 가족들과 함께 이용하는 구조였다. 우리는 짐가방 두 개를 연결해 놓고 매트리스를 그 위에 올려놓은 ‘침대’에서 잤다. 장연화 기자체스터 장-남기고 #4 남기고 싶은 이야기

2022-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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